편지를 읽는다. by Paul Nouge





책상 위에 꺼내져 있던 편지와 엽서를 오늘에서야 읽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글씨에 서린 불안감에 순수하게 이입하게 된다.
작은 것에도 두려워하고, 또 작은 신호에 확신을 얻었던 그 때.
미래가 단지 견뎌내야하는 버거운 대상이었던 그 때의 우리. 지금도 '우리'라고 말해도 되는 건진 모르겠지만,
우린 모두 여렸고, 깨지기 쉬운 존재였다. 그래서 서로를 안기보단 그 당시의 시간이 멈추길 바랐는지도.


벌써 3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3년이란 시간동안, 내 글씨는 이 편지의 글씨체를 닮아간건지도 모른다. 글씨뿐만 아니라 내가 이 편지를 닮아간게 아닐까.
나는 여전히 모든 것에 두려워하고 무책임하게 모든걸 놓아버리고 있다.
그 때 이후로 나의 많은 것이 변했다. 그 상처들은 아물었지만 내성이 생기진 않았다.


아름다웠다고 말하고 싶지만 단순히 감상뿐인 추억이 되는건 원치 않는다. 그래서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는다.




편지를 다시 고이 접어 봉투에 넣었다.
서랍에 넣지 않고 책상 한 켠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이 편지와 나는 수면 위에 실재한다.











무관심한 새벽 by Paul Nouge




하루를 약기운에 취해 잠들었다가 잠깐 정신이 맑아진 지금 온전히 새벽을 보내고 있다.
영화를 보다가 꺼버렸다.
좋아하는 음악을 골라듣는다.

조금전엔 문득,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싶어졌다.
언제부턴가 나의 이상을 지배하기 시작한 그 광활함을, 고립과 고독의 공간을
현재로, 실제로 가져오고 싶어졌다.


읽고 싶었지만 쉽게 시작할 수 없었던 책들,
파스칼의 팡세, 헤세의 유리알 유희 같은 책들을 그 곳에선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읽고 싶은 책들,
헤세의 데미안, 사르트르의 말, 지드의 지상의 양식같은 책들도.

나를 가두고 싶다.
그 광활함 속에, 지평선조차 찾을 수 없는 그 곳에 나를 던져두고 한없이 헤메도록 하고 싶다.



지금의 나는, 
모든 단어가 버겁고 무거워 쉬이 입밖으로 내질 못한다.
언제쯤 이것들을 짊어질 힘이 생길까.
겨우 감당하는 것이 아닌 여유를 가질 수 있을까.



푸른새벽의 Last Arpeggios를 듣는다.
흘러나가는 듯한 기타와 키보드의 연주에도 흔들리는 나는.






의외의 장소 by Paul Nouge







의외의 장소를 찾고자 비가 오는 날에도 꾸역꾸역 옷을 입고 레인부츠를 신고 밖으로 나왔다.
한참을 걷다 우산 위를 올려다보니 작은 구멍이 보였다. 그 구멍을 통해 우산줄기로 물이 흘러내렸다. 손은 조금씩 젖어들었고
그 축축함이 무언가를 대신한다고 확신했다. 나는 그 흘러내리는 빗물에 많은 것을 의지하며 걸었다.

출발할 때부터 카페 한 곳이 자꾸 생각났다. 완전한 의외의 장소는 아니지만, 그래도 몸을 숨기기엔 완벽할거라 생각했다.
버스에서 내려 바로 그 카페로 가지 않고 조금 돌아가는 길을 선택했다. 주말의 사람들 사이를 유유히 빠져나가 잠시 좋아하는 갤러리로 들어갔다. 전시가 진행중이었으며 작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 또는 그녀의 그림들은 모두 아팠다. 숨을 고르려 들어갔던 곳에서 나는 더 큰 아픔을 떠안고 있었다. 자연스레 나의 아픔은 그 곳에 내려둔 채 나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우산을 잡은 나의 손은 다시 젖어왔다. 
서둘러 원래 가려했던 카페로 들어갔다. 의외의 커피를 시켰으며 테이블에 올려둔 채 밀린 몰스킨을 억지로 다 채우고 허수경 시인의 시를 읽었다. 몇 가지 할 일이 생각났지만 집에 가서 하기로 하고 나는 어둑해진 거리로 다시 돌아갔다.
의외의 장소에서 특별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완벽하게 몸을 숨겼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완전한 의외의 장소란 존재할 수 있을까, 내가 그 장소를 납득할 수 있을까.











The Division Of Gravity by Paul Nouge


없었으면 좋았을걸 by Paul Nouge











방 한구석에 혼자 앉아서 매일매일 같은 생각
해 보아도 똑같은 자리에서 난 멈춰 있고
널 좋아하게 돼버린 이유 우리가 이렇게 돼버린 이유를 
찾고 싶은데 점점 더 모르겠어

차라리 친구로만 차라리 싫어했다면
차라리 몰랐다면 그게 차라리 나았을 거야
화단에 핀 보랏빛 꽃도 너무 커다래 무섭던 달도
손에 쥐면 바스라질 것 같았던 그날 공기도

행복한 시간이 지나가면 그만큼의 슬픈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데 난 그럼 너무 길 것 같아
네게 받은 상처가 이렇게도 많은데
해 주고 싶은 것이 아직 너무 많아서 그게 아쉬워
너무 아파서 울었던 밤도 보고 싶어서 죽겠던 밤도
사랑에 빠졌던 밤도 모두다


화단에 핀 보랏빛 꽃도 너무 커다래 무섭던 달도
손에 쥐면 바스라질 것 같았던
너무 아파서 울었던 밤도 보고 싶어서 죽겠던 밤도
사랑에 빠졌던 밤도 없었으면 좋았을걸






/전혀 공감할 수 없는 가사인데도 목소리와 차분한 연주가 열어주는 공간이 너무 아프게 다가온다.
가사를 곱씹어 들으면 마치 연기를 하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정말 내게 저런 감정이 피어오른 것처럼,
사실은 그것이 내게 벌어진 일임에 감사하면서도 없었으면 좋았을걸, 이라며 노래하는 그 마음을
조금은 다른 차원으로 공감하고 마음 아파한다.









풍경/ by Paul Nouge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 by Paul Nouge





저물녘_ 모과의 일

장석남




저물면 아무도 없는 데로 가자
가도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

고요의 눈망울 속에 묻어둔
보석의 살들 - 이마 눈 코
깨물던 어깨,
점이 번진 젖, 따뜻한 꽃까지 다 어루어서
잠시 골라 앉은 바윗돌아 좀 무겁느냐?
그렇게 청매빛으로다가 저문다

결국 모과는 상해버렸다







/내 고요가 어디론가 사라지는 순간, 내 모든 빛도 함께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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